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후아나 1세(카스티야) (문단 편집) === 유폐된 여왕 === [[페르난도 2세]]는 사위 [[펠리페 1세]]가 죽자 딸 후아나의 섭정으로서 사실상 스페인 1인 통치에 들어가 더욱 의욕적으로 대외 팽창에 나선다. 그는 이미 1504년 프랑스와 각축을 벌여 [[이탈리아]]의 [[나폴리]]와 [[시칠리아]]를 차지했고, 1512년엔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에 낀 [[나바라 왕국]]의 피레네 산맥 이남을 차지했다. 신대륙 정복에도 한창 가속도가 붙어 [[쿠바]]를 비롯한 중아메리카 동부 해안이 스페인 수중에 떨어졌다. 그런 한편으로 통치를 보다 강고히 하기 위해, 1507년 나폴리에서 귀국 직후 딸 후아나를 그녀의 막내딸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카탈리나]]와[* 남편 펠리페 1세가 죽은 지 5개월 뒤에 태어난 [[유복자]]였다.] 함께 토르데시야스 성에 가두고 카스티야 섭정직에 올랐다. 이 경위에 대해서는 권력을 분점하지 못하게 유폐했다는 설과 그녀를 노리는 정적으로부터 보호했다는 설이 있다. 그 와중에 [[잉글랜드]]의 [[헨리 7세]]는 왕비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후 후아나와의 결혼을 추진하려고 했었다. 비록 후아나가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알려지긴 했어도 여전히 유럽에서 제일 가는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이었던 만큼, 그녀와 결혼하면 카스티야의 영토를 자신의 수중에 넣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 어마어마한 양의 [[지참금]]은 덤. 그러나 이 결혼을 추진하려고 한 지 채 1년도 안 되어 헨리 7세 역시 세상을 떠나버렸다. 무엇보다 죽으나 사나 남편바라기인 후아나가 이 결혼을 받아들였을 확률도 거의 0%였을 듯. 게다가 헨리 7세는 후아나의 아버지인 페르난도 2세와 [[아라곤의 카탈리나]]의 지참금 문제로 10여 년을 싸워댄 전력이 있는데, 사위와도 카스티야 영토를 차지하려고 서로 안달이 났던 페르난도 2세가 절대 가만히 놔두지 않았을 것이다. 페르난도 2세는 첫 번째 아내 [[이사벨 1세]]가 사망한 거의 직후 자식보다 어린 프랑스 왕실 혈통의 [[https://en.wikipedia.org/wiki/Germaine_of_Foix?wprov=sfla1|제르멘 드 푸아]]를 계비로 들였는데[* 프랑스의 [[루이 12세]]의 외조카로, 페르난도 2세와의 사이에 아들을 하나 낳았지만 이 아들은 1509년 5월 3일에 태어난 지 단 몇 시간 만에 사망했다. 이후 자녀는 없었다. 그런데 이 아들의 이름도 후안이었다.] 재혼한 아내와의 사이에서 살아남은 자식이 없자, 후아나의 아들들을 후계자로 삼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다(아라곤 왕위에 대한 건 [[카를 5세]] 항목을 참고). 그는 사위인 펠리페 1세를 정말로 싫어했고 그 싫어하는 사위의 영지인 네덜란드에서 태어나고 자란 맏손자 [[카를 5세]]보다는 스페인에서 태어나고 자란 [[페르디난트 1세]]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었지만 이럴 경우 아라곤은 페르디난트에게, 카스티야는 카를에게 분할 상속될 뿐더러 또 다른 내전을 부를 여지가 있었기에 [[카를 5세]] 쪽으로 바꿨다고 한다. 여러 일이 있었지만 페르난도 2세 사후 결국 카를은 어머니 후아나와 공통 통치하는 형태로서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국왕이 되었다. 후아나는 공식적으로 카스티야와 레온, 아라곤의 여왕이었고, 그 아들인 [[카를 5세]](스페인에서는 카를로스 1세)에 이르러 실질적인 통합이 이루어져 스페인 연합 왕국이 출범하게 된다. 다만 카를 5세는 어머니를 유폐당한 상태 그대로 놔둬서 그녀는 여전히 실권이 없었다. 후아나는 사망할 때까지 공식 직함 대부분을 그대로 갖고 있었기에 카를 5세는 그녀 생전엔 어머니의 공통 통치자로서 스페인을 통치했다. 왕이 되기 위해 스페인에 귀국한 카를 5세와 자매 1명은 먼저 후아나를 만나러 토르데시야스로 갔다. 이는 살아있는 여왕인 후아나에게서 인정 받으려는 요식 행위로, 무뚝뚝한 어머니와 낡은 옷을 입은 여동생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카탈리나]]를 처음 만난 카를로스는 마음 아파했다고는 하나 이후 다시는 그곳을 찾지 않았다. 자식들 모두 후아나를 찾거나 구해주려 하지 않았고, 후아나도 자식들의 안부를 묻긴 했다지만 그들을 부르거나 꺼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카를 5세는 통치 초기에 스페인 국민들에게 반발을 사는 바람에 반란이 여러 차례 일어났는데, 1520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카를이 [[신성 로마 제국]] [[선제후]] 투표를 위해 잠시 스페인을 비운 틈을 타 [[톨레도]]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후아나가 유폐되어 있는 장소, 토르데시야스를 점령하고 후아나에게 완전한 통치권을 넘긴다는 문서를 들이밀고 실권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후아나는 국정을 이끌 자신감도 없고 의심도 많아서 이를 승인하지 않았다.[* 유폐당했다기보다는 후아나 본인이 탑에서 나가는 걸 거부했다는 말도 있다. 유폐 과정 자체는 그녀의 의사와 무관했을지 모르지만, 그녀가 탑에서 나가겠다는 의사 표현을 했다는 기록이 없다. 후아나에게 거부당한 코뮤네로 반란군은 결국 자신들 마음대로 그냥 후아나에게 실질 통치권을 '반환'했으며, 이를 집행하는 건 본인들이 만든 아빌라 임시 혁명정부라고 선언했다.] 특히 후아나의 자식들은 막내 [[오스트리아의 카탈리나|카탈리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와 떨어져 자랐고, 너무 어릴 때 두고 온 후 다시 보지 못했기에 정이 없어 그녀가 죽을 때까지 찾지도 않아 가정적으로도 매우 불행했다. 그나마 죽었을 때 카를 5세가 장례를 치러주었으니 다행.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